장재형목사-십자가의 식탁에서 만난 배신과 용서: 영혼을 살리는 회복의 은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여정에서 겪는 가장 비참하고 가슴 아픈 상처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적의 갑작스러운 공격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두운 밤 한 식탁에 마주 앉아 다정하게 떡을 나누며 마음을 터놓던 사람의 차가운 등을 바라보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서로가 너무나 가까웠기에 깊이 믿고 의지할 수 있었고, 그렇게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어 주었기에 바로 그 친밀함의 깊이만큼 배신과 상실의 통로 또한 아프게 뚫리게 됩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의 깊은 성경 강해는 구약의 시편 41편과 신약의 요한복음 13장을 하나로 연결하는 바로 이 극적이고도 쓰라린 식탁의 장면 앞에 우리를 오랫동안 멈춰 서게 만듭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는 구약 다윗의 비통한 탄식은, 역설적이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거룩한 마지막 식탁의 자리에서 생생한 현실로 그대로 재현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의 검은 속셈을 전혀 모른 채 영문도 모르게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추악한 배신의 계략과 아픔을 처음부터 끝까지 환히 아시면서도, 오히려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친히 씻기셨으며, 유다의 그 완악한 손에 사랑의 떡을 직접 건네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완벽한 선함이나 도덕적 결백이 철저히 확인된 뒤에야 비로소 주어지는 계산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주받을 자리가 마땅한 그 사람이 비록 어둠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지라도, 스스로 돌이켜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도록 마지막 은혜의 자리까지 아낌없이 비워두는 참된 부성애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나눈 그 엄숙한 식탁의 풍경은 단순히 따뜻하고 은은하기만 한 평화로운 장면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스스로 내려가신 하나님의 한없는 섬김과 사랑, 그리고 그 엄청난 사랑을 똑같이 받고도 기꺼이 양심을 팔아 어둠의 권세를 향해 걸어 나가는 인간의 비열한 배신이 하나의 좁은 공간 속에 기이하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바로 이 충격적인 대비의 현장을 통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어내셔야만했던 내면의 쓰라린 괴로움과 애끓는 슬픔을 우리의 가슴 깊이 바라보게 만듭니다. 구약의 시편 41편에서 다윗 왕이 그렇게도 처절하게 아파했던 이유 역시 이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성벽 바깥에 멀리 떨어져 있던 생판 모르는 원수가 아니라, 바로 내 상탁에서 함께 떡을 나누던 가장 가까운 친구가 결정적인 순간에 등에 칼을 꽂듯 발꿈치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진정한 배신이란 원래부터 아무런 관계도 없던 생소한 곳에서 생겨나는 가벼운 생채기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쌓아 온 깊은 신뢰와 사랑의 탑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때 찾아오는 견딜 수 없는 영혼의 상실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와 닮은 비참한 순간들을 너무나 자주 만나게 됩니다. 전적으로 믿고 의지했던 사람의 냉정한 말 한마디는 수년이 지나도 마음의 상처로 오래도록 남아 맴돌고, 한마음으로 인생의 험한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등을 돌려버리면 그동안 함께 나누었던 모든 시간과 추억마저 가짜 거짓말처럼 느껴져 허무함에 몸부림치게 됩니다. 밤새워 뜨겁게 기도를 드려도 답답한 가슴의 응어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위로를 얻고자 성경 말씀을 읽어 내려가도 내 상처받은 마음을 후벼 파는 비정한 장면들만 머릿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될 때가 수없이 많습니다. 지나간 날들의 엇갈린 대화들은 잠들지 못하는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고, 그 당시 당당하게 하지 못했던 억울한 말들은 깊은 밤이 찾아올수록 더욱 선명해져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3장이 우리에게 찬란하게 계시하는 진리는, 인간의 그 어떤 잔인하고 치졸한 배신의 크기보다 훨씬 더 광대하고 깊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품은 배신의 흉계를 미리 눈치채지 못하셨기에 발을 씻기신 것이 결코 아니며, 앞으로 그가 개과천선하여 변할 가능성을 철저하게 머리로 계산해 본 뒤에 떡을 건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그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영혼들을 향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셨기에, 타락한 그 영혼을 향해 회개의 문을 마지막까지 단 한 순간도 닫아걸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1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입으로 직접 배신에 대해 말씀하시며 심령이 몹시 괴로우셨다고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은 묵상은 그 거룩한 심령의 괴로움 속에는 단순히 제자에게 배신당한 인간적인 분노나 억울함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잃어버린 영혼이 끝내 고집을 부리며 멸망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애끓는 눈물이 서려 있음을 정확하게 읽어 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자유로운 선택과 의지를 억지로 강제하거나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영원히 굳어지기 전까지, 어둠 속에서 헤매는 영혼에게 본래 돌아가야 할 생명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끝까지 손가락으로 가리켜 줄 수는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위대한 사랑은 인간의 추악한 죄악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충 가볍게 여기거나 눈감아 주시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불쌍한 죄인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거룩한 생명의 길을 반드시 남겨 두십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파한 이 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이 본문을 읽을 때 가룟 유다라는 단 한 사람만을 손가락질하며 우리 자신을 의로운 구경꾼의 자리에 세우지 못하도록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그날 밤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다른 제자들도 겟세마네 동산의 어두운 그늘 아래서 주님을 홀로 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대제병의 무리들이 들이닥쳐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아가자 겁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으며,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 앞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주님을 저주하며 세 번이나 모르게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연약함 그 자체만을 놓고 냉정하게 저울질해 본다면, 이 세상에 과연 그 누구가 스스로를 가룟 유다와는 완전히 구별된 거룩한 존재라고 자신 있게 거리를 둘 수 있겠습니까. 가룟 유다와 수제자 베드로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갈라놓은 결정적 차이는, 그들이 인생의 길목에서 치명적으로 넘어졌는가 아니면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실패 유무에 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처절하게 넘어져 통곡하며 잿더미 위로 엎어졌지만 다시 주님께로 돌이켜 돌아왔고, 유다는 끝까지 자신의 고집과 계산을 내려놓지 않은 채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아걸은 채 영원한 어둠 속으로 스스로 걸어 나갔을 뿐입니다. 시편 41편에 등장하는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내가 주께 죄를 범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라는 절박한 기도의 외침은, 이 두 사람이 마주한 전혀 다른 갈림길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우리에게 가장 선명하고 극적으로 비춰 줍니다.

가룟 유다의 진정한 비극은 그에게 인생을 돌이킬 만한 회복의 기회가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더러운 발을 씻기던 따뜻한 물이 있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 떡을 다정하게 건네주던 구원의 손길이 분명히 존재했으며, 그의 완악한 심장을 기다리시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초대와 부름보다 자신의 머리로 굴리던 이기적인 세상의 계산과 물질적 욕망을 더 굳게 붙들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자신의 비참한 실패와 연약함이 드러난 그 부끄러운 자리에서 어떻게든 인간적인 의로움이나 변명을 포장하려 애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추한 눈물로 뼈저린 연약함을 정직하게 인정하였고,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찾아오셨을 때 그 사랑의 눈빛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내려놓고 다시 사랑을 뜨겁게 고백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생의 길을 걷다가 진흙탕에 넘어졌다는 그 단순한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넘어진 이후에 내 영혼의 시선을 과연 어느 방향을 향해 돌리느냐 하는 것이 두 사람의 영원한 길을 완전히 갈라놓았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자기 자신을 세상 끝까지 저주하고 미워하며 스스로를 학대하는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그 방향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잘못된 멸망의 길임을 철저히 인정하고, 아직도 나를 향해 팔을 벌려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다시 얼굴을 돌이켜 뛰어가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단 한 번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뻣뻣한 강함보다, 비바람에 꺾여 흔들린 뒤에도 엎드려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한없는 긍휼을 간절히 구하며 다시 일어설 줄 아는 겸손한 용기 속에서 훨씬 더 환하게 빛나기 마련입니다. “내 영혼을 고치소서”라는 고백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무너진 자의 비참한 패배 선언이 아니라, 차가운 땅을 딛고 은혜의 보좌를 향해 다시 한 걸음 힘차게 내딛는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은 묵상적 메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자라나는 아주 작은 어둠의 싹까지도 정직하게 돌아보게 만듭니다. 사소한 서운함과 섭섭한 감정을 마음속 깊은 곳에 수년 동안 묵은지처럼 품고 살아가며,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내 기준대로 마음껏 정죄하고, 하나님의 따뜻한 순종보다는 내 머리로 굴리는 영악한 자기 계산을 항상 앞세우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과 생명의 식탁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고 만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신앙의 자리에 똑같이 앉아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부르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영혼과 마음은 이미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 아닌 전혀 엉뚱한 파멸의 길을 향해 방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는 우리에게 타인의 허물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과연 이 중에서 누가 진짜 가룟 유다인가”를 찾아내기 위한 명분을 주지 않고, 대신 “내 자신의 내면에는 혹시 세속적인 계산으로 굳어져 가는 딱딱한 마음이 없는가”를 엄숙하게 묻게 만듭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신학이란 남의 잘못과 실패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정죄할 명분을 쌓아 올리는 지식이 아니라, 나의 더러운 영혼을 하나님의 눈부신 빛 앞에 벌거벗은 채 정직하게 세우는 겸손함이어야 마땅합니다. 복음은 다른 사람의 영적 실패와 연약함을 흥미롭게 설명하는 차가운 소문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나 자신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떠나면 언제든지 비참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며 돌아서는 모든 자를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는 놀라운 생명의 소식입니다.

삶이 고달프고 마음의 기도가 막히는 그런 암담한 날에는 그럴듯하고 긴 미사여구의 문장보다 “주님, 이 죄인의 상한 영혼을 불쌍히 여겨 고쳐 주소서”라는 단 한마디의 고백이 하나님 앞에서 훨씬 더 정직하고 살아 있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 앞에서 얼마나 옳았고 얼마나 억울했는지를 끝까지 증명하려는 완고한 마음도,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에게 기회만 되면 똑같이 갚아 주고 싶은 복수심도,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고 나 홀로 철저히 마음을 닫아걸겠다는 냉소적인 다짐도 모두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바로 그 정직한 고백의 자리에서부터 우리의 영원한 치유와 회복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차갑게 굳어 있던 마음에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다시 스며들 수 있는 아주 작은 틈이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설교의 시선은 단지 개인의 내면적 치유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함께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향해 넓고 깊게 확장됩니다.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떡을 떼던 제자들은, 바로 그 곁에 앉아 있던 가룟 유다의 마음에 날마다 얼마나 시커먼 어둠이 깊어지고 있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밤중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밖으로 나갈 때에도, 다른 제자들은 그저 명절에 쓸 가난한 이웃을 위한 물건을 사러 가거나 필요한 심부름을 하러 나가는 줄로만 순진하게 생각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깊이 짚으며,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의 영혼의 상태를 무관심하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이 있고 세심하게 살피는 영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누군가가 갑자기 묵묵부답으로 멀어져 가고 있을 때 그의 행동을 함부로 오해하고 단정지어 비난하기보다, 그가 겪고 있는 말 못 할 영적 약함과 상처를 깊이 헤아리며 기도의 무릎으로 그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는 따뜻한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진정한 영적 권고란 상대방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며 윽박지르는 날카로운 말이 아니라,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 혼자 어둠의 골짜기로 걸어 들어가지 않도록 묵묵히 붙잡아 주는 따뜻한 손길이어야 합니다.

참된 영적 돌봄이란 모든 것을 샅샅이 파헤치고 감시하려는 사법적 감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멀어져 가는 지체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그의 연약한 필요를 채워주며, 오직 온유한 사랑으로 다시 온전한 회복을 돕는 거룩한 섬김입니다. 때로는 그 사람의 잘못된 태도나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바로잡아야 할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절대로 사람을 밖으로 밀어내거나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시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품 안으로 기쁨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데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친히 씻기신 세족식의 장면은 바로 그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구체적 모양을 우리에게 온전히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겸손한 순종, 잘못을 슬그머니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의 영혼 자체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인내, 그리고 치명적으로 넘어졌을 때 다시 한 번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아낌없이 베푸는 한없는 긍휼이 그것입니다.

참된 교회란 이 세상에서 완벽하고 흠 없는 의인들이 모여 서로의 잘남을 뽐내는 사교 집단이 아니라, 저마다 깊은 상처와 허물을 안고 있는 죄인들이 모여 서로의 연약함을 품고 감당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함께 회복을 경험하는 치유의 동산이어야 합니다. 성도가 함께 이루어가는 공동체의 진정한 깊이와 성숙함은, 그들이 함께 기쁘게 웃고 축하했던 화려한 시간의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인생의 밑바닥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그 곁을 얼마나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지켜주었는가 하는 그 진실성에 의해서 비로소 증명됩니다.

물론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해서 과거에 겪었던 그 끔찍한 배신과 상처의 기억들이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다윗 왕 역시 자신이 겪은 배신의 고통과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서 숨기지 않고 눈물로 솔직하게 쏟아냈으며, 우리 구주 예수님 역시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며 심령이 몹시 괴로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거룩한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위로와 은혜의 본질은, 우리 삶의 아픔의 크기를 억지로 축소하거나 가볍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우리가 겪는 그 어떤 아픔과 상처의 깊이보다,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크신 손길과 소망이 훨씬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데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처절한 배신을 한 번이라도 깊이 경험해 본 사람은 때때로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 자체까지 의심하며 극심한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뭔가 능력이 부족하고 모나서 이런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닌가, 앞으로 내 남은 인생에서 과연 다른 누군가를 다시 마음 놓고 온전히 믿어도 되는 것인가,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이라는 가치를 선택하는 내 삶의 방식이 어리석고 미련한 것은 아닌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그러나 시편 41편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렇게 쇠약해져 병상에 누운 자를 친히 붙드시고, 그 상한 영혼의 자리에 찾아와 다시 일으키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눈물로 고백합니다.

이 세상의 차가운 상처를 묵묵히 견뎌내는 진정한 믿음이란,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억지로 웃어 보이는 위선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내 가슴이 아프고 멍들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아프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미움과 복수심이 내 남은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마음의 키를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나를 찌른 이들을 향한 최종적인 판단의 권한을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드리고, 내 안의 상처가 곪아 터져 나중에 또 다른 누군가를 찌르는 잔인한 배신의 씨앗이 되지 않도록 내 영혼의 정원을 가꾸는 일이 바로 성도의 거룩한 싸움입니다.

우리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고난의 길 역시 정확히 바로 이 같은 영원한 구원의 방향을 우리에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추악하고 완악한 배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계획을 단 1초도 멈추게 만들지 못했고, 제자들의 비겁한 실패와 도망이 부활 이후의 놀라운 영적 회복의 역사를 결코 막아설 수 없었습니다. 실패의 낙담 속에 숨어 있던 베드로는 다시 찾아오신 주님으로부터 눈물의 부르심을 새롭게 받았고, 두려움에 떨며 흩어졌던 제자들은 마가다락방에 다시 모여 성령의 불길을 온 세상에 지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이처럼 너무나 명확하고 강력합니다. 배신과 절망은 결코 우리 인생의 마지막 최종적인 말이 될 수 없으며,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서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회복의 길이 언제나 새롭게 열려 있고, 깊은 상처로 신음하는 모든 영혼에게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소망이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비록 바다처럼 깊고 어둡다 할지라도,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뜨거운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갈보리 언덕 위에서 온 세상에 남김없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준 가해자인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는 연약하고 상처 입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믿음은, 나 자신을 언제나 흠 없는 의로운 편에 세워두고 남을 심판하는 교만이 아니라, 내 자신의 추한 영혼을 깊이 살피고 내 곁에서 함께 울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의 손을 결코 놓치지 않는 겸손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이란 거창하고 화려한 말로 포장된 설교보다 항상 먼저, 저 멀리서 방황하는 이가 언제든지 다시 찾아와 쉴 수 있도록 돌아올 수 있는 따뜻한 자리를 묵묵히 남겨둔 채 조용히 기다려 주는 인내의 태도로 나타납니다.

오늘도 한 식탁에서 은밀하게 시작된 이 거룩하고 엄숙한 생명의 말씀은, 우리의 닫힌 관계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함께 숨 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은 과거의 쓰라린 상처와 두려움 때문에 철저하게 닫혀 있지는 않은지, 혹은 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누군가가 아무런 말도 없이 영혼의 어둠 속으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모진 고통을 참으시며 끝까지 열어두신 그 은혜와 사랑의 문을 깊이 묵상할 때, 오늘 당신은 과연 내 곁의 누구에게 영원한 회복을 위한 따뜻하고 작은 손길을 가장 먼저 내밀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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