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성탄 설교 메시지: 십자가의 첫사랑, 변하지 않는 복음의 심장

1부: 낮아짐의 신비, 그 은빛 계절에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

겨울의 한복판, 도심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인공적인 불빛들이 밤하늘을 수놓을 때, 역설적이게도 신앙의 깊은 심연에는 고요하고 무거운 질문 하나가 내려앉습니다. “우리는 매년 찾아오는 이 계절에 참으로 무엇을 기뻐하며,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종교개혁이란 결국 복음이라는 순결한 생명수에 인간의 얄팍한 공로와 비본질적인 전통이 뒤섞였을 때, 오직 기록된 계시의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거대한 영적 몸부림이었습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엄숙하고도 오래된 질문을 오늘날 성탄의 문턱 위에 다시금 엄격히 세워 둡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본질적인 성찰을 촉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성육신하신 사건이 왜 인간의 그 어떤 행위나 종교적 노력으로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은혜’인지를 깊이 되묻게 만드는 것입니다.

대개 현대인들에게 성탄은 한 해의 피로를 위로하는 따스한 계절적 축제나 감상적인 분위기, 혹은 낭만적인 장식으로 소비되곤 합니다. 그러나 성탄의 참된 신비는 결코 그러한 정서적 안락함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시기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왜 하나뿐인 독생자를 죄로 물든 역사 속에 밀어 넣으셔야만 했는지, 왜 스스로 한계를 지닌 연약한 인간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해답이 되시는지를 온몸으로 고백하는 엄숙한 시간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선포하는 우주의 중심축은 오직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맹렬하고도 아낌없는 사랑이며, 그 사랑의 종착지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단독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탄의 거리에서 마주하는 빛은 단순히 밤거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감상용 조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깊은 그늘과 사망의 절벽 아래 서성이는 인간 영혼을 향해, 하늘로부터 곧게 내려온 유일한 생명의 길을 비추는 준엄하고도 자비로운 생명의 서치라이트입니다.

율법의 절망에서 생명의 법으로: 낮아지심의 구속사적 계보

이 깊은 묵상의 여정은 베들레헴 말구유의 아늑한 풍경에 서정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복음의 선포는 구주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인간 실존의 비참함을 선언하는 로마서의 거대한 교리적 맥락과 필연적으로 연결합니다. 로마서 5장이 고발하듯, 인류는 첫 사람 아담의 단 한 번의 불순종으로 인해 거부할 수 없는 죄의 유전과 죽음의 지배 아래 신음하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소망이 끊어진 인류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 번째 아담을 통해 비로소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새 길이 선물처럼 주어졌습니다. 이어지는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죄와 사망의 법이 깨어지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신자의 영혼을 영원히 해방하였음을 선포합니다. 결국 성탄이란, 이 위대한 해방과 구원의 드라마가 인간의 어떠한 도덕적 분투나 종교적 자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져 종의 형체를 입으신 그리스도의 일방적인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은혜의 확증적 선언입니다.

그렇기에 “왜 다른 이가 아닌 오직 예수여야만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은,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왜 서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물음으로 번져 나갑니다. 오늘날 거리에 십자가가 가득하고 교회의 외형이 거대해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복음의 역동성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왜 우리에게 유일무이한 건짐의 소식인지를,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소망의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오직 기록된 말씀으로써 가감 없이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참된 복음의 도리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숙시키는 본연의 소명을 망각한 채 외적인 성장에만 매몰된다면, 아무리 화려한 성탄 장식과 대형 칸타타로 예배당을 치장할지라도 정작 성탄의 참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문밖에 세워 두는 비극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2부: 본질의 약화와 혼합주의의 유혹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일은 흔히 바다를 정화하는 소금의 역할에 비유되곤 합니다. 소금의 가치는 그 양의 방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유의 ‘짠맛’을 잃지 않는 데 있습니다. 바다의 면적이 아무리 넓고 물의 양이 무한할지라도, 소금이 그 고유한 맛을 잃어버린다면 바다의 부패를 막아낼 재간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영향력 또한 숫자의 많고 적음이나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와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구원의 감격과 복음의 선명함을 상실하는 순간, 아무리 거대한 조직망과 세련된 인프라를 자랑할지라도 세상 속에서 부패를 방지하는 생명력을 잃고 표류하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최우선의 과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세련된 마케팅 기법을 추가하는 덧셈의 사역이 아닙니다. 이미 거저 받은 원초적 복음의 맛을 정직하게 회복하는 뺄셈의 결단입니다. 이 거룩한 회복은 종교적인 활동의 양적 팽창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랑의 샘 근원으로 겸손히 되돌아갈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경을 깊이 읽고 묵상하는 영적 훈련은 단순히 지적 만족을 채우거나 신학적 지식을 축적하는 행위를 초월합니다. 살아 있는 말씀은 우리가 종교적인 타성에 젖어 일상 속에서 무감각하게 잃어버렸던 구원의 첫사랑과 감격을 날카롭게 일깨우며, 지금 나의 신앙적 지향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 좌표를 냉철하게 비추어 줍니다. 성탄을 온전하게 기념한다는 것은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난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조용히 추억하는 지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이 순간, 그분의 성육신과 대속의 사건이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나의 구체적인 삶을 절망과 정죄로부터 어떻게 해방하셨는지, 그리고 나를 어떠한 거룩한 소명의 자리로 부르고 계시는지를 세밀하게 청종하는 실존적인 사건입니다.

희석된 진리와 인간의 가식: 갈라디아의 엄중한 경고

선지자 이사야가 목 놓아 외쳤던 “물 탄 포도주”와 “찌끼가 끼어 빛을 잃은 은”의 메타포는 진리가 어떻게 서서히 오염되고 변질되는지를 너무나 선명하게 고발합니다. 본질적으로 완전하고 충분한 것에 인간의 손길과 인위적인 조미료를 가미하는 순간, 진리의 독특한 풍미와 광채는 즉각적으로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갈라디아서를 관통하는 예리한 시선을 빌려, 지상 교회가 직면한 가장 교활하고 치명적인 위험은 복음을 대놓고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무신론적 태도에 있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오히려 입술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인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인간의 율법적 행위나 문중의 전통, 교단적인 규례와 고집스러운 도덕적 사치들을 슬그머니 얹어야 한다고 속삭일 때, 이미 영혼을 죽이는 “다른 복음”의 무서운 파멸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실제로 초대 갈라디아 교회를 침투해 극심한 분란을 일으켰던 거짓 가르침은, 이방인 신자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구원을 얻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종교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이 주장을 단호하게 배격했던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종교적 예식에 대한 사소한 견해 차이나 학파 간의 논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단번에 이루신 완전한 구속 사건과 쏟아부어 주신 조건 없는 은혜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선언하는 불신앙이자 모독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갈라디아서 1장의 서슬 푸른 경고는, 십자가의 복음이란 결코 인간의 시대적 요구나 문화적 편의에 따라 적당히 가감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준엄하게 가르쳐 줍니다.

물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역사적 전통과 제도적 질서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경건한 예배의 예식과 신앙 공동체의 합리적인 규례는 연약한 성도들의 믿음을 보호하고 신앙생활을 돕는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차적인 도구들이 어느새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으로 둔갑하거나, 그리스도의 거저 주시는 은혜 위에 인간이 만든 또 하나의 배타적인 문턱을 높이 세우는 순간, 그것은 본래의 선한 기능을 상실하고 영혼을 옥죄는 사슬이 되고 맙니다. 교회의 법과 모든 행정적 제도는 오직 복음이라는 값진 보화를 안전하게 담아내는 깨끗한 그릇이어야 할 뿐, 복음 그 자체를 대체하는 주객전도의 내용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이 불투명해지고 은혜의 빛이 바랜다는 것은 결국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사랑의 온도가 식어 간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은혜가 행위에 기반한 계약과 조건으로 전락할 때, 신자들은 더 이상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보다, 자신의 의로움과 자격을 끊임없이 검증받기 위해 종교적인 에너지를 소모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를 증명하려는 피말리는 시도 속에서 신앙의 참된 기쁨은 이내 율법적 의무가 주는 고단한 피로감으로 바뀌고, 공동체의 거룩한 헌신은 영혼 없는 종교적 형식주의로 굳어 버립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향해 신선한 충격과 변화를 주는 생동감을 잃어버린 까닭은 세상적인 프로그램이나 사회적 봉사 활동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 모든 종교적 움직임을 추동하는 본질적인 엔진이자 동력인 ‘십자가의 첫사랑’이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3부: 오직 은혜의 영적 해방과 개혁자의 태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뼈대를 이루며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이 된 선언은 바로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절대적 가치입니다. 이 역사적인 고백은 결코 신자로서의 도덕적 책임이나 거룩한 삶의 의무를 아무렇게나 팽개쳐도 된다는 무책임한 방종의 면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쌓아 올린 그 어떠한 대단한 성취나 고결한 도덕성도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서는 구원의 털끝만 한 근거조차 될 수 없음을 눈물로 고백하는 가장 철저하고 겸손한 신앙적 자기부정입니다. 영혼의 깊은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을 온전히 신뢰하고 이를 입술로 시인한다는 것은, 나의 공적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종교적 바벨탑을 허물고 이미 십자가에서 완전히 성취되어 선물로 주어진 구원의 바다에 영혼의 닻을 내리는 거룩한 굴복이자 순종입니다. 참된 믿음은 나의 의로움을 담보로 구원을 매매하는 거래의 수단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을 담기 위해 욕심 없이 내미는 텅 빈 손일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장엄한 고백은 이 단순한 믿음이 한 인간의 내면과 삶의 궤적을 얼마나 혁명적으로 완전히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지를 실감 나게 증명합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예전의 자아와 욕망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그 위에 세련된 종교적 교양이나 경건의 모양새를 몇 가지 장식품처럼 덧붙이는 온건한 도덕 수양의 과정이 아닙니다. 나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죽어 장사 지낸 바 되고, 이제 내 안에 사시는 부활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걸어 나가는 영적 재창조의 사건입니다. 더 나아가 갈라디아서 5장 1절이 선포하는 참된 영적 자유 역시 내 육체의 정욕과 이기적인 욕망을 마음껏 투사하며 살아갈 방종의 권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구원을 성취하고 유지하기 위해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했던 절망적인 인과율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제는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에 기꺼이 기쁨으로 응답할 수 있게 된 자유, 즉 ‘사랑의 자발적 종’이 되는 신비로운 자유입니다.

역사적 개혁신앙의 위대함은 바로 이러한 복음의 원형적 중심으로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하는 부단한 자기 개혁의 태도에 있습니다. 진정한 개혁은 16세기라는 과거의 한 시점에 일어났던 박물관 속의 역사적 사건을 박제하여 기념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오늘날 교회가 매 순간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서슬 푸른 말씀의 거울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서, 가련한 교만으로 복음의 본질 위에 덧칠해 놓은 온갖 종교적 군더더기와 인간적인 탐욕을 과감하게 깎아내고 비워 내는 현재진행형의 거룩한 투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리 교육을 철저히 하고 깊이 있게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도 결코 타인보다 우월한 지적 교만을 과시하거나 도그마의 상아탑을 쌓기 위함이 아닙니다. 복음과 지극히 유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묘하게 포장되어 영혼들을 다시금 정죄와 두려움의 사슬에 묶어 버리는 온갖 왜곡된 가르침을 영적으로 분별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선명한 순도를 끝까지 파수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는 지성적인 작업과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뜨거운 온도는 결코 이분법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영역이 아닙니다. 믿음은 차가운 지식의 조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와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 통찰과 교리적 뼈대는 단순히 차가운 메스로 복음의 원리를 해부하는 지적 유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우리를 영원한 파멸에서 건져 내신 십자가 은혜의 감격이 얼마나 크고 확실한지를 끊임없이 기억나게 도와주는 따스한 이정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말씀은 연약한 이웃을 함부로 정죄하고 재단하는 위선자의 무기가 아니라, 우리 안의 모든 거짓된 자아를 수술하고 생명의 영생 길을 드러내는 성령의 예리한 검으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4부: 변질되지 않는 복음의 심장을 파수하라

복음의 원형적 순수성을 지켜 낸다는 거룩한 명분은 결코 우리에게 타인의 부족함과 오류를 손가락질하며 영적 우월감에 도취되어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을 주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떠나 방황하는 이스라엘 동족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명이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구원받기를 갈망했던 그 애끓는 긍휼의 심장처럼,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인간적인 조건과 거짓 교리에 속아 길을 잃은 영혼들이 다시금 거저 주시는 은혜의 중심으로 온전히 돌아올 수 있도록 눈물로 돕는 어머니의 품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선명한 경계선은 한 치의 타협도 없이 견고히 지키되 영혼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잃지 않아야 하며, 교리적 오류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분별하되 실족한 자들이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회복의 문은 언제나 넓게 열어 두는 따뜻한 균형 감각이 절실합니다. 복음은 상대를 굴복시키고 이기기 위한 논쟁의 무기가 아니라, 깨어지고 상한 자들을 살려 참된 해방과 자유의 축제 자리로 초대하기 위해 겸손히 건네는 생명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거룩한 하늘의 메시지를 방황하는 세상 한복판에 강력하게 증거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논리와 성경적 진리를 더욱 예리하게 갈고닦아야 합니다. 아무런 내용도 없는 막연한 열심이나 일시적인 정서적 흥분만으로는 무신론과 다원주의 속에 빠져 신음하는 현대인들에게 “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설득력 있고 깊이 있는 소망의 이유를 제시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유기적이고 깊이 있게 체득하고, 복음이 가진 영광스러운 진리의 논리를 흔들림 없이 붙잡을 때, 교회의 전도와 선교는 단순히 길거리에서 외치는 공허한 종교적 구호를 넘어 한 인간의 굳게 닫힌 내면의 빗장을 부수고 영혼을 완전히 흔들어 깨우는 위대한 삶의 증언이 될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그토록 다양한 문화적 장벽과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어 동일한 복음이 전 대륙에 전파될 수 있었던 위대한 비결 역시, 구원의 근거와 역사적 능력이 가변적인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 사건의 능력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태동하고 진정한 의미의 영적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가를 분별하는 기준 또한 결코 가시적인 예배당 건물의 웅장함이나 등록된 신자의 화려한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본질은 그 공동체를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앙고백의 뿌리가 얼마나 건강한가, 그리고 강단과 삶의 현장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단독적인 대속과 은혜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선포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은혜의 순수한 복음이 교회의 깊은 대지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때, 그 공동체에는 인위적으로 조장하지 않아도 영혼의 진정한 해방과 넘치는 희락, 아낌없는 형제 사랑과 세상을 향한 불타는 전도와 선교의 열매들이 자연스럽게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복음의 터전 위에 인간의 공로나 또 다른 위선적인 종교적 조건들이 야합하여 섞이게 될 때, 겉으로는 아무리 화려하고 활기차 보일지라도 내면에는 소리 없는 절망과 영적인 고갈, 끊임없는 비교 의식과 피로감이 가득하여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정화하고 살리는 영적인 면역력은 양적인 규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의 눈부신 선명함에서 비롯됩니다.

장재형 목사가 던지는 묵직한 신학적 메시지는 성탄이 품고 있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갈라디아서가 선포하는 가차 없는 다른 복음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마침내 한자리에서 입체적으로 만나게 합니다. 구세주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무조건적인 은혜를 찬란하게 기억하는 일과, 그 은혜의 충족성 위에 인간의 그 어떤 보잘것없는 조건도 덧붙이지 않는 영적 정절을 지키는 일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성탄을 기념한다고 하면서 정작 예배의 내부에서 복음을 또 다른 종교적 의무와 거래의 조건으로 은밀히 가려 버린다면, 그것은 온 동네에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의 불빛을 밝히면서도 정작 세상의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광채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우매한 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영광스러운 기치만을 높이 들 때, 교회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낮아지고 무력해져 겸손해지며, 동시에 어두운 세상을 향해서는 하늘의 권세를 힘입어 무한히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해마다 성탄의 절기는 어김없이 돌아오지만, 우리가 간직한 복음은 세월의 흐름과 반복 속에서도 결코 낡아지거나 닳아 없어지지 않습니다. 물을 조금도 타지 않아 그 향취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최고급 포도주처럼, 시간이 흐르고 역사의 격랑이 몰아칠수록 우리를 살린 갈보리 십자가 사랑의 깊이와 은혜의 순도는 더욱 또렷하고 선명하게 그 빛을 발할 뿐입니다. 변질되지 않는 복음은 교회를 외적으로 더욱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 주는 장식품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교회를 안으로부터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영원히 멈추지 않는 뜨거운 심장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거친 세상의 소용돌이 속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믿음과 예배의 깊은 한가운데에서 복음은 여전히 아무런 조건 없이 값없이 부어 주신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의 선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종교적 이기심과 두려움으로 덧붙여 놓은 온갖 세상의 조건들 아래 짓눌려 조용히 숨을 잃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금 우리의 연약한 무릎을 꿇고 말씀의 거울 앞에서 이 질문을 엄숙히 마주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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