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토대 – 장재형목사

Ⅰ. 역병과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

인간은 본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다. 시편 62편의 말씀이 들려주는 바와 같이 인간은 때로 요동치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죽음의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곧바로 불안에 사로잡히곤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공포가 역병이 돌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설교한다.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시대나 주기적으로 찾아온 전염병 앞에서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두려움에 떨었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 때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그 이후에도 동양과 서양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났던 전염병은 인류 역사에 커다란 공포의 흔적을 남겼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바이러스에 무기력해지고, 사람들은 감염될까 두려워하며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거나 격리에 들어간다.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을까.

특히 역병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위협을 느끼는 존재인지 실감나게 보여준다. 병에 걸려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가 세계 곳곳을 휩쓸면, 현대인들도 일상에서 누리는 풍요를 내려놓고 두려움에 마음을 닫아버린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느끼는 공포가 가장 원초적인 불안임을 모두가 체험하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역병 앞에서의 불안은 단지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나, 혹은 경제적 손실에 대한 걱정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깔린 “죽음이 닥치면 어떡하나”라는 존재론적 고민이 결합되어 있다. 교만했던 인간이 자연재해나 전염병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지고 연약해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어느 나라에서 칼로 목을 베어 처형시키려 할 때 갑작스럽게 벼락이 떨어져 사형을 집행하려던 자가 죽었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생명은 결국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과 생명의 주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바라보면, 인간의 교만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스스로를 지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모든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이 믿음은, 성도들로 하여금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도록 돕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흔들리는 것이 사실이기에,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소망을 두느냐’는 문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는 시편 62편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 설교의 핵심 중 하나다.

인간은 동물들보다 ‘지성’에서 우월하다고 자부하지만, 때로는 동물들이 자연의 변화를 미리 감지하고 위험에서 도망치는데 정작 인간은 뒤늦게 깨달아 피해를 입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쓰나미가 닥치기 전에 해변의 동물들은 바다 반대쪽으로 피난을 간다는 일화나, 지진이 시작되기 전 쥐가 먼저 눈치를 채고 도망간다는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모습은 신기해 보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자연재해나 전염병 같은 위기 상황을 얼마나 늦게 깨닫고 대응하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얼마나 큰 피해를 입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인간은 세상 만물 중에서 지적인 면에서 뛰어나다고 자만하며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역병이나 자연재해 앞에서 여전히 무력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 무력함 앞에서 우리는 다시 죽음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인간의 이성이나 교만한 마음, 그리고 세속적인 기술이 죽음을 완벽하게 막아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점이 바로 지금처럼 전염병이 퍼질 때다. 설령 과학이 백신을 개발하고 치료법을 어느 정도 제시한다 하더라도, 죽음을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힘은 인간에게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무렵, 인간이 이성의 힘을 절대적으로 믿는 자유주의 신학이 팽배했고, 문명과 과학, 진보를 맹신하는 풍조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전쟁이 야기한 파괴와 수많은 죽음은 그러한 교만을 산산이 깨뜨렸고, ‘인간중심적’ 낙관주의가 한순간에 무너짐을 보여주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역사적 교훈이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하다고 말한다. 인간이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하는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 역병이나 전쟁 같은 대형 재앙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전염병이 돈다는 것은 인간이 여전히 자연과 죽음 앞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의 재확인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나는 혹시 죽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빠지게 하고, 일상적인 모임이나 행사부터 대면 예배까지 모든 것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수많은 사람이 밖에 나가기를 꺼리고, 사회적으로는 마스크 착용이나 손 씻기 같은 위생 수칙을 의무로 삼는다. 특히 교회 역시 정부의 방역 지침을 따라 일정 기간 모임을 제한하거나, 온라인 예배를 진행하는 등의 방식을 고민한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도들이 “죽음을 두려워해 예배도 놓아버리는가”라는 자기점검에 직면한다는 점이다. 물론 불필요한 위험을 무릅쓰고 성도들을 위협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정부의 지침에 순종하되, 동시에 주일성수를 포함한 영적 삶을 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교회의 본질은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다. 역병은 지나갈 것이고, 잠시 어려운 시기를 겪지만 그 과정을 통해 더욱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메시지가 있다.

교회 역사와 성경을 돌아보면,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시기에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소망의 길을 제시해 주셨다. 출애굽기의 장면에서 애굽에 역병과 재앙이 들이닥칠 때, 이스라엘 백성은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가게 하셨다. 지금 우리 시대 역시 새삼스레 생명과 죽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맞이한 셈이다. “생명은 다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고백이 다시 입술에 오르게 된다. 우리는 사슴이나 멧돼지처럼 갑작스럽게 먹이와 보호처를 찾아 내려오는 모습에서, 그리고 쓰나미를 미리 감지하고 도망가는 동물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본능적 갈망과 함께 참된 구원의 방주, 곧 하나님의 품을 찾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인간의 교만을 제어하는 것이 역병이라는 도구일 수 있다는 데서, 우리는 불안과 공포 속에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결국 죽음의 공포라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다. 전염병은 외적인 환경을 위협하는 동시에, 내면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사람들은 여기서 크게 두 갈래 길을 본다. 한쪽은 완전히 낙심하여 절망하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찾는 길이다. 성도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힘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다. 시편 기자도 “나의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느냐”라고 탄식하면서도, 동시에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했다. 생사화복의 주권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에, 궁극적으로 죽음조차 그 안에서는 영원한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Ⅱ. 하나님만이 반석이며 구원이심

시편 62편은 ‘하나님만 바라라’는 중심 메시지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는 구절이 대표적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시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비롯한 인생의 모든 불안한 요소들로부터,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본문이라고 해설한다. 특히 역병 앞에서 우리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게 될 때, 시편 기자의 고백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시편 기자는 ‘반석(Rock)’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이야말로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토대임을 보여준다. 반석은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충격에도 쉽게 깨어지지 않는 단단함을 상징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황량한 광야나 팔레스타인 지역의 험한 지형을 체험하면서, 반석이라는 이미지가 곧 “안정, 보호, 지탱”을 의미함을 충분히 이해했다. 마찬가지로 현대인에게 하나님은 ‘반석’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역병이 일어나고, 전쟁이 벌어지고, 경제가 흔들릴 때에도 그분의 존재만은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토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나 제국은 세월과 함께 무너질 수 있으나,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다.

또한 시편 기자는 ‘요새(Refuge, Fortress)’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한다. 요새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해 주는 방어 기지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은 백성에게 피난처와 산성으로 언급되며, 믿는 자가 위기를 맞았을 때 달려갈 수 있는 분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단지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반복된 실제 체험을 토대로 한 신앙 고백이다. 역병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가 현실화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켜줄 ‘요새’를 찾는다.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더 이상 안전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면, 그때서야 비로소 많은 이가 교회 혹은 하나님께 눈을 돌리게 된다. 생사를 주관하시며 영원한 안전을 보장하시는 존재는 하나님 외에 없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1장을 펼쳐보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한다. 예수님께서 친구 나사로가 이미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지난 후에야 찾아가셨고, 그 지체되는 시간으로 인해 죽음을 경험한 가족들이 극심한 슬픔에 빠져 있었지만, 결국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 35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슬픔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인간이 겪는 고통과 두려움, 슬픔을 주님이 함께 공감하시고, 그 한계를 아파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주권자가 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궁극적으로 죽음의 권세를 뛰어넘는 능력이 자기에게 있음을 밝히신다.

또한 예수님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심으로써, 믿음의 본질을 정면으로 제시하신다. 생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면, 인간은 죽음 앞에서도 영원한 소망을 놓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예수님이 죽음을 뛰어넘는 분이시며, 사망의 권세가 그분 앞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은 세상적 관점에서 느껴지는‘죽음’이라는 공포를 넘어설 힘을 얻게 된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망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며 죽음을 조롱한다. 죽음을 조롱한다는 표현은,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가 철폐되었다고 믿는 신앙 고백이다.

결국 시편 62편과 요한복음 11장, 그리고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이해는 하나로 귀결된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조차 영원한 끝이 되지 않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역병이 퍼져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할지라도, 성도는 그것으로 인해 완전히 절망에 빠지거나 염려와 두려움 속에 갇혀 버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장재형목사가 전한 말씀처럼, 이런 시기에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는 데 그 초점이 맞춰진다. 이것이 “주만이 나의 반석이며 구원이시고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고백의 현대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설령 우리가 바이러스 감염에 노출되어 육체적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끝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면, 세상이 주는 공포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 물론 인간적으로 두렵지 않을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나마“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임을 되새김으로써 마음을 붙들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믿음을 토대로 ‘죽어도 사는 생명’에 대한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특별히 전염병이 돌 때, 마음의 불안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이 긴급히 필요한 시기가 또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살 길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 지금이라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편 62편은 “반석”과 “요새” 그리고 “피난처”라는 단어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극적으로 묘사한다. 우리의 구원과 영광이 그분께 있기에, 비록 온 세상이 뒤흔들리고 전염병이 확산되어도,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는 구절처럼, 낙담하고 불안해하는 이들을 향해 성도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는 “더 하나님께 나아가라.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라는 외침일 것이다.

성경은 역병이나 전쟁, 기근, 자연재해 등이 찾아올 때, 그것을 단순히 ‘재수 없는 일’로 치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한 이후 하나님께서 “혹 기근이나 역병이 임했을 때, 회개하고 내게 돌아오면 내가 그 기도를 듣고 이 땅을 고치겠다”고 약속하신 부분(역대하 7장 등)은 매우 상징적이다. 죄악이 관영하고 스스로를 높이던 사람들이나 사회가, 역병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국률을 구하며 자복하고 회개할 때, 그때서야 하나님은 그 땅에 치유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유효한 원리다. 오늘날 전염병이 번져 갈 때,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단지 육체적 방역 수칙을 따르는 것을 넘어 영적으로도 자신을 성찰하고,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극률을 구하는 데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위기 시기야말로 우리가 더 깊이 회개하고, 말씀을 붙들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달려가는 때다”라고 설교한다.

시편 62편에 묘사된 하나님이 바로 그럴 만한 분이다. 온 우주와 온 땅을 지으신 창조주이자, 역사의 주관자이며, 개인의 생명까지도 주관하시고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은 생사의 열쇠를 쥐고 계시므로, 우리가 현실적으로 느끼는 죽음의 위협을 궁극적 결말로 보지 못하도록 막아 주신다. 믿음 없이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우나, 한 번 그 크신 능력과 인자하심을 맛보면 결국“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고백에 이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역병이나 다른 어떠한 재앙이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지라도, 그것을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영적 기반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한 근원적 문제, 역병과 재앙의 현실 속에서 성도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반석 되신 하나님”이시며 “나의 구원이 되시는 주님”이다. 사망과 죄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를 결정적으로 보여 주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부활은 그분의 능력을 확증한다. 전염병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 체감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 사랑과 능력을 동시에 붙들고 “우리를 향한 주의 뜻이 선하고 영원하다”는 믿음 안에 거할 수 있다.

Ⅲ. 교회의 역할과 기도, 그리고 실천

역병의 시기는 교회와 성도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선명하게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13장의 말씀, 곧 위에서 주어진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원리에 따라, 정부의 방역 지침을 잘 따르고 다른 이들의 안전도 세심히 배려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교회가 사회적 거리 두기나 온라인 예배 전환 등 현대 문명의 도구를 활용해 성도들의 안전과 건강을 도모하는 것은, 헌법과 정부 방침을 전혀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믿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지혜로운 모습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주일성수와 예배 공동체성 자체를 아예 포기하는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신앙은 공예배를 비롯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야 하며, 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역병이 온 세계를 휩쓸어 불안이 극도에 달하면, 사람들이 영적 안식처를 찾고자 교회를 향해 눈을 돌릴 가능성이 커진다. 이때 교회가 신실하게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담대한 믿음 안에서 움직이며, 동시에 겸손과 순종의 태도로 사회의 안전에 기여할 때, 세상은 교회를 바라보고 “어떻게 저들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질문이 “오직 하나님만이 반석이요 요새요 피난처가 되신다”는 복음 증거의 기회가 된다. 교회는 이 사명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현실적으로 교회 내에서도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히는 성도들이 많을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는 분위기가 절실하다. 야고보서 5장에 따르면, 고난당하는 자는 기도하고,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를 청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서로 죄를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해 간구하라는 말씀 역시 공동체적 돌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했는데, 이 말씀이 바로 교회를 통해 강력하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엘리야가 기도할 때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비가 왔다는 기록(열왕기상 17-18장)은 개인 한 사람의 기도가 공동체와 사회 전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준다. 그러므로 지금 역병이 퍼지는 이 시대에 교회가 먼저 자복하고 회개하며, 이 땅을 고쳐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던 엘리야도 그러했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특권을 받은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책임과 기회가 있겠는가.

이와 더불어 장재형목사는 격리 생활이나 사회적 거리 두기를 영적 훈련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일상적으로 분주함에 쫓겨 제대로 말씀을 읽고 기도할 시간을 내지 못했던 이들이, 오히려 강제적으로 집에서 지내면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강제로라도 멈춰 서게 되었을 때,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회개하며, 말씀으로 자신을 정결케 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머무는 시간도 ‘가정 예배’나 ‘부모의 신앙적 양육’을 실천하는 시기로 삼을 수 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모이지 못할 때, 각 가정이 작은 교회 역할을 하며 말씀과 기도를 이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으려고 하지만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라는 마태복음 23장 말씀이 있다.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셨던 그 장면은, 본래 하나님이 얼마나 백성을 돌보려고 하시는지,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보호하시고자 하시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만약 백성이 스스로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강제로 모으지는 않으신다. 역병이 맹위를 떨칠 때,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가까이 나아오라고 손을 내미시고, 그 날개 아래로 들어오기를 권유하시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세상적 가치나 두려움만을 좇는다면, 결국 우리는 주님의 보호 아래 거할 수 없다. 따라서 교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주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오라”는 초청을 널리 전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실천적 교훈 중 하나는 ‘겸손함’이다. 인간이 과학과 문명을 자랑할수록, 예상치 못한 재앙 앞에서 무력해지는 장면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인플루엔자로 매년 수만 명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통계가 있듯이, 전염병은 늘 주변에 존재해 왔다. 다만 큰 유행이 일어날 때 인간은 “손을 자주 씻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돌아보게 된다. 우리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기본과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믿는 자라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나의 호흡도 하루아침에 끊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더욱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역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든 수고를 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생명과 죽음의 권세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잊지 않는 자세가 진정한 겸손이 된다.

교회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세상이 두려워서 혼란스러워할 때, 오히려 더욱 담대한 믿음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낼 수 있다. 단, 이때의 ‘담대함’이란 방역 지침을 무시하거나, 사회적 책임을 저버린 채 모이기를 고집하는 식의 경솔한 태도가 아니다. 정부의 요구 사항을 지키고, 손을 자주 씻고, 적절한 거리 두기도 실천하면서, 동시에 “예배와 기도는 중단할 수 없다”는 신앙적 결단을 지키는 방식이 참된 담대함이다. 교회는 불필요하게 세상에 반감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통해 위로와 희망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지역사회의 대표’라는 책임감을 품고, 마음을 닫고 두려워하는 이웃들에게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죽어도 산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함을 여러 차례 설교한다. 실제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전염병 시대에 더욱 선명해질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과연 죽어도 사는 생명을 믿는가?”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는가?” 이것은 관념적 종교가 아니라, 생사를 다투는 현실 속에서야 비로소 가슴으로 체득되는 진리다. 교회가 이 소망을 붙들고 흔들리지 않을 때, 세상은 교회 안에 담긴 영적 능력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목격이야말로 복음 전파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결국 역병의 시기는 교회가 더욱 깨어 기도하고, 세상이 어디로 가야 참된 평안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보여 줄 때다. 성도 개개인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삶을 정결히 하며, 가족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영적 부흥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 깊어질 때, 역병이 지나간 후 더욱 견고해진 믿음의 공동체로 서게 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두려움에 떨기보다, 회개와 섬김, 그리고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성도의 바른 태도”라고 말한다. 교회는 이 시기에 서로 떨어져 있어도 영적으로 연대하며, 온라인 예배나 가정 예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나눈다. 사람을 대면할 수 없을 때마다 전화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영상통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교제를 이어간다. 이렇게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하나가 되어, 오히려 서로의 믿음을 북돋아 주고 지지한다면, 역병으로 인한 격리 기간이 결코 영적으로 공백 상태가 되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통해 결국 역병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재앙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용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땅을 고치시는 분이시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전염병과 재앙, 전쟁을 통해 이 원리가 반복해서 증명되어 왔다.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드리는 회개와 간구가 쌓일 때, 주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환난이 지나가게 하시고, 우리에게 회복과 치유를 허락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그 은혜를 사모하는 가운데 기도하자는 메시지가 바로 시편 62편과 요한복음 11장, 그리고 야고보서 5장 등이 교차하며 주는 통합적 교훈이다.

마지막으로, 역병의 시간은 결국 지나간다. 다만 그 기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과 삶은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성숙할 수 있다. 만약 전염병이 휩쓴 시기에 성도가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의 방법으로만 survival(생존)을 추구했다면, 그것은 믿음의 길을 놓쳐 버린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시기를 영적 갱신의 기회로 삼아, 기도와 말씀, 회개와 겸손을 삶 속에 실천했다면, 역병이 끝난 후 더 성숙한 공동체로 세상에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주가 나의 반석이요 요새시며, 내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고백이 구호가 아니라 실제 삶의 증거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화된 교회가 역병 이전에 당연하게 여겼던 모임과 예배, 사역에 대한 소중함을 새롭게 발견하고, 이웃을 섬기는 사랑과 전도의 열정을 거듭 회복한다면,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체와 소망을 엿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장재형목사는 역병이 도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죽음의 공포와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인식하되, 그것을 넘어서는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붙잡고, 시편 62편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만이 진정한 반석이자 요새가 되신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다. 동시에 야고보서 5장 말씀에 따라 교회가 깨어 기도하고 서로 죄를 고백하며 병든 자를 위해 간구할 때, 의인의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믿고 실천하자고 권면한다. 정부의 방역 정책과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주일성수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어려운 시기를 오히려 영적 성숙과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을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와 성도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부활 소망을 세상에 전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생사화복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기억해야 하며, 이런 시기에 더욱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간구해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고치시고, 교회를 더욱 견고히 세우시리라는 신뢰가 우리 안에 싹틀 것이다. 세상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교회는 흩어진 자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복음의 문을 열어 두어야 한다. 주님의 반석 위에 선 자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 그 일이 바로 역병의 시대에 우리가 부름 받은 이유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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