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성령의 탄식

1.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

로마서 8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선포한다.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이 말씀을 해석하며,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과 하나님의 영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강조한다. 고난이 없이 영광만을 말할 수 없으며, 영광 또한 고난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여 얻게 되는 하나님의 존귀함과 거룩함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의 관계는 ‘비교 불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극명한 차원이 다른 가치를 드러낸다.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에는 현재의 고난이 너무나 크고 무거워 보이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볼 때에는 그 고난조차도 나중에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지극히 가벼운 것이라는 의미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러 설교와 강연에서, 바울의 이러한 ‘미래의 영광’에 대한 확신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종종 설명한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체험과 신뢰, 그리고 미래에 대한 하나님 약속에 대한 믿음이 그 확신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펼쳐내는 사상은, 고난과 고통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서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것이 결코 우리의 파멸이나 절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선포한다. 바울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은, ‘고난의 크기가 작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이 훨씬 더 크고 찬란하기에, 지금의 고난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 영광에 비교하면 미미한 것이다’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겪는 고난은 대부분 ‘희망 없는 고생’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도인은 미래가 있고 약속이 있는 고생을 한다”고 말한다. 고난이 완전히 사라지는 세계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맞닥뜨리지만, 그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펼쳐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견딘다. 이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복음의 본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고 말씀하셨다. 즉,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라도 믿음의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그 고난의 자리에 복이 내리며, 장래에는 더욱 확고한 영광이 주어진다는 선언이다.

바울이 말하는 ‘보상 신앙’은 세속적인 대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예수 믿는 자로서 행한 선행과 의를 위해 받는 핍박에 대해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신다는 것은, ‘영광’의 궁극적인 시점이 하나님께 있음을 의미한다. 장재형 목사는 믿음의 생활을 하는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소소한 축복이나 현세적인 풍요’에만 시선을 고정하지 말고,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가 들어가게 될 천상의 영광을 바라봐야 한다고 여러 차례 설파했다. 이러한 시선은 우리로 하여금 당장의 어려움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게 만든다. 눈앞에 보이는 고통, 재정적 어려움, 박해, 차별, 건강 문제, 관계의 파탄 등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훗날 누릴 영광을 더욱 선명히 바라보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8장을 해설하면서, 바울이 ‘영광을 위해 주어진 고난의 의미’를 꿰뚫고 있음을 강조한다. 바울 자신도 담에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의식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행위를 쌓아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깨달은 뒤에는, 과거의 그 모든 유대교적 열심과 지식이 오히려 배설물처럼 여겨졌고(빌 3:8),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영광을 발견하게 된 이상, 이 세상이 주는 유혹이나 반대로 이 세상이 가하는 박해는 바울을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강조하는 소망은 ‘현재의 생활고나 어려움’을 단순 회피하기 위한 정신 승리가 아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우리 인생의 미래가, 단순히 행복한 결말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함께 누리는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아무리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 실패한 인생처럼 보일지라도,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천상의 풍성한 영광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단순 윤리나 도덕으로 축소시키지 말고, 그 안에 있는 거대하고도 우주적인 구원 계획에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이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이다.

바울은 19절에서부터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말하는 ‘고대(apokaradokia)’에 담긴 헬라어적 뉘앙스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아포카라도키아(ἀποκαραδοκία)는 ‘간절히 기다리는 것, 고통 속에서 애타게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 아이가 소풍을 앞두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심정, 혹은 해 뜨기를 바라는 사람이 밤새도록 창문을 열어보면서 “언제 동이 트나” 하고 긴 밤을 지새우는 마음과 비슷하다. 한자로 쓰면 ‘고대(苦待)’, 즉 고통스럽게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바울은 피조물이 하고 있다고 말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보통 ‘기다림’을 하는 주체로 사람을 떠올리지만, 여기서는 ‘피조물’이 주어가 된다. 자연계,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사람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주적 회복(cosmic salvation)”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창세기 3장 17절을 보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 그 소산을 먹으리라”라는 선고를 통해, 하나님이 원래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 파괴되고 만다. 주인이 되어야 했던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자연을 제대로 돌보거나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횡포를 부리며 자연을 괴롭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인류가 행해온 대규모 자연 파괴 현상을 보며, “인간의 사악함은 단지 도덕적 범죄에 그치지 않고, 피조물까지도 신음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환경 문제, 생태계 파괴, 기후 변화는, 인간의 탐욕과 오만함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를 명확히 보여주는 예시들이다. 본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름답게 유지되었어야 할 지구는, 이제 인간의 잘못된 지배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이렇게 피조물은 더는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없고, ‘허무한 데 굴복’하는 존재가 되었다(롬8:20).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파괴와 신음이 ‘영원한 결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연이 보복적으로 인간을 파괴해버리지 않고, ‘조금만 더 기다려라’ 하고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는 통찰이다.

장재형 목사는, 인간의 능력과 기술로 아무리 자연을 컨트롤하려 해도 결국 자연의 힘에 속수무책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들어, “자연은 인간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으시면 그 심판적 힘을 완전히 폭발시키진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곧 바울이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롬 8:21)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맥이 닿는다. 인류의 타락으로 함께 타락한 피조물이지만, 그들도 언젠가 회복될 세계를 간절히 고대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미래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암시하는 우주적 구원과 요한계시록 21장에 예언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 결국 같은 그림의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완전한 세계가 타락으로 인해 깨어졌지만, 마지막에는 완전히 회복된 영광스러운 세계로 결론 지어진다. 이 회복된 세계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가 충만한 자리이며, 그곳에서 피조물도 함께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요한계시록의 결말을 가리켜 ‘Grand Finale’라고 부른다. 역사의 비극과 절망이 결코 끝이 아니며,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는 장엄한 선언으로 귀결된다는 말씀이다(계 21:5). 이런 구원의 큰 그림이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궁극적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이 하나 되어, 하늘과 땅이 겹치는 완전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해설한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종말론이 서로 만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결실을 맺는 것이다.

자연히 바울의 메시지는 이 우주적 구원뿐만 아니라, 개인 구원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로마서 8장 23절에서 바울은“피조물뿐 아니라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이는 단지 영혼 구원에 대한 갈망만이 아니라, 몸의 구원까지 포함한다. 장재형 목사는 성경에서 말하는‘몸’에 대한 중요성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늘 역설한다. 그는 “몸”이 실제 우리의 육체임과 동시에,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의 차원까지를 포괄한다고 해석한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어,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향하시는 사랑과 거룩에까지 나아가는 것, 그 과정을 통해 교회가 온전히 세워지는 것이 곧 ‘몸의 구속’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결국 로마서 8장 24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이미’와 ‘아직’이라는 신학적 개념을 잘 풀이한다. 즉, 구원은 이미 우리 안에 임했고, 동시에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은 시점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선물을 이미 받은 자이지만, 아직 최종적이고 완전한 형태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된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여전히 기대하며 기다리는‘아직’의 상태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긴장 속에서 신자는 미래의 영광을 오늘 ‘믿음’으로 선취하여, 인내하며 살아간다.

장재형 목사는 이 부분을 설교할 때,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과 함께 설명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으로 인해, 아직 눈에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와 약속을 오늘 이 순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 중에 있어도 기뻐할 수 있고, 박해를 받아도 인내할 수 있으며,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도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바울도, 또한 오늘날 우리가 존경하는 수많은 신앙 선배들도 이 믿음을 지니고 살았고, 장재형 목사 역시 자신의 사역 전체에서 “성도는 미래의 영광을 선취함으로 오늘을 이긴다”라는 관점을 거듭 확인해 준다.

더불어, 장재형 목사는 구원을 단지 ‘개인 영혼의 구원’으로만 협소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로마서 8장의 핵심은, 인간의 죄성 문제를 뛰어넘어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이 회복되고, 자연도 다시 제자리를 찾으며,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이루는 나라가 구원의 최종적 모습이다.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구원을 심도 있게 풀어 설명한 다음, 8장 후반부에 와서 ‘피조물의 탄식’과 ‘장차 회복될 세계’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구원의 ‘개인적 측면’과 ‘우주적 측면’ 모두를 통합적으로 볼 때, 우리는 인간 중심적 편협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계획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키워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은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1)로 마무리된다. 이는 곧 바울이 자기 사역 내내 줄기차게 강조했던 핵심 메시지가 ‘하나님의 나라’임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우리가 암송하는 주기도문 역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는 대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의 사역, 예수님의 가르침, 초대교회의 전승은 모두‘하나님의 나라’라는 결론을 향해 맞춰져 있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신약 전체의 핵심이며, 우리의 종말론도 결국 그 나라가 임하는 데 있음을 역설한다. 종종 교회가 종말을 ‘무서운 심판’의 프레임으로만 몰아가거나, 혹은 지나치게 세속적 소망(현세적 욕망 충족)에 함몰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크고 아름다운 결론을 놓치는 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거룩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밝은 전망이기 때문이다. 한때 세계 역사에서 등장했던 세속적 유토피아 운동들은, 사실상 성경이 말하는 희망을 모방했으나 왜곡해서 적용한 경우가 많았고, 결국 한계를 드러내며 스러져갔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 명시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분명히 붙들고 있다면, 잘못된 종말론이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진정한 소망 가운데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 장재형 목사의 설명이다.

바울이 말하는 로마서 8장의 대미는 우리에게 단 한 가지 결론을 준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진대, 참음으로 기다리라”(롬 8:25). 장재형 목사는 이 ‘참음’(인내)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인내는 고난을 의미 없이 견디는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미래의 영광을 붙들고 오늘을 능동적으로 버텨내는 성숙한 믿음의 모습이다.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린 뒤 열매 맺을 때까지 수고하며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인생이라는 밭에 복음의 씨를 뿌려 놓고,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기쁨으로 경작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견뎌낼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2. 피조물의 탄식과 성령의 도우심

로마서 8장 26~27절로 넘어가면, 바울은 기도의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기도의 본질은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즉, 기도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연약하여 미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라는 것이다.

흔히들 “왜 기도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인간의 지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막연한 자기 위안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과 신학은 전혀 다르게 말한다. 기도는 단지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도구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참여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구하는 통로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고 솔직히 인정한 부분에 주목한다. 죄로 인해 우리의 판단력은 흐려져 있고, 심지어 어떤 것을 구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연약하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연약함을 도우신다. ‘도우신다’는 말은, 성령이 우리를 치켜세워 주시고, 우리 기도가 부족하고 왜곡되어 있을지라도 그것을 ‘중보’하여 하나님께 올려 드리신다는 의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성령의 중보’ 개념을 이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서서 이루신 중보사역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선언한다. 우리의 기도는 본래 죄악된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 보혈로 길을 여셨고, 그 결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 한편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이 교회에 강림하심으로써 예수님이 이루신 그 구원의 실제를 매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은 단지 우리 마음속에서 ‘막연한 종교적 느낌’을 주는 영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상황을 꿰뚫고 계시는 분이기에, 우리의 기도마저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다듬어 주신다.

장재형 목사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표현, 즉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는 구절을 매우 깊이 있게 묵상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인간이 기도할 때, 예를 들어 “이것을 주세요, 저것을 해결해 주세요”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부합하는 것인지는 당장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깊은 내면을 아시며,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정확히 아시기에, “탄식”이라는 간절하고 애끓는 표현을 통해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신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백성의 죄와 멸망을 보며 탄식했던 모습과 유사하다(에스겔 21:6 등). 하지만 훨씬 더 친밀하고 강력한 차원에서, 성령은 우리 안에 임재하시어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위한 기도를 올리신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부족한 기도조차도, 성령의 보충과 중재를 통해 하나님 보좌에 상달되는 것이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롬 8:27)는 말씀은 기도의 결론 부분과도 같다. 결국 기도는 우리가 어떤 미사여구나 수사학적 표현을 멋지게 늘어놓았기에 응답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시는 그 탄원을 들으심으로써 응답이 일어난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린 은혜의 기도 통로 위에, 성령이 우리를 극진히 돕고 계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내 기도가 잘못되었을지라도, 성령께서 바로잡아 주시고, 우리가 고백하지 못한 부분도 채워 주시며, 하나님의 선을 이루도록 인도하신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기도의 핵심 태도로 ‘연약함의 인정’과 ‘성령의 역사에 전폭적으로 의지하기’를 강조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 지혜 있는 어른들도, 경험이 많은 이들도, 결국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대 중국의 일화인 ‘새옹지마’를 떠올려보자. 말이 도망가서 슬퍼하다가, 그 말이 암말을 데리고 돌아오니 기뻐하고, 또 아들이 말을 타다가 다리가 부러져 슬퍼하다가,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 결국 우리는 무엇이 복이고 화인지, 그 시점마다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마땅히 구할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의 처지를 솔직히 깨닫는 것이 진정한 기도의 시작이다. 이는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출발하고, 동시에‘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처럼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는, 더 이상 구약 시대처럼 우리 죄의 문제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채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의 길이 끊어졌고, 성령 강림을 통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현실’을 일상 속에서 누릴 수 있다. 이 놀라운 은혜는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하며, 그 중보의 열매가 우리 심령에 임하여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확장된 것이다(히 7:24~25). 이 사실을 깨달을 때, 기도는 결코 기계적인 종교 의무나 형식적인 행위가 될 수 없다. 우리의 기도는 ‘성령의 탄식’이라는 불가해한 차원과 연결되어, 우주적 구원 계획과 맞물려 돌아가는 강력한 통로로 변화된다.

이처럼 로마서 8장 18~27절을 맥락적으로 살피면, 첫째는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의 대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얼마나 견고한가’가 드러나며, 둘째는 ‘피조물이 탄식하고 우리도 탄식하지만,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심으로, 궁극적으로 우리를 영광의 자유와 온전한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선명히 드러난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우주적 구원’의 비전이자, 기도로 연결되는 삶의 동력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일상의 얽매임 속에서 쉽게 낙심하거나 세속적 가치관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을 인정하고 의지할 때, 우리의 기도는 비록 서툴고 힘없어 보여도,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을 따라 강력히 일하시게 된다.

종합하자면, 로마서 8장 18~27절은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고난이 결코 ‘영광’을 막지 못함을 알려주고, 동시에 우리의 연약함이‘기도’를 가로막지 못함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 과거를 청산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지치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의 힘의 비결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우심에 달려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진리를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우리도 여전히 고난이 도처에 있고, 탄식할 일들이 차고 넘치며, 기도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약함을 체감하는 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망을 붙드는 순간, 이 소망은 우리를 끊임없이 ‘믿음의 새로운 단계’로 옮겨 놓는다. 장재형 목사는“그리스도인에게 소망이란, 현실을 무시하거나 덮어버리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선포된 구원이 확실하다는 믿음에 근거한 ‘견고한 미래 인식’”이라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오늘 당하는 불의와 억울함, 박해와 슬픔이 결코 영원하지 않고, 훗날 오히려 더 큰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구할 바를 모를 때조차도,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므로, 우리는 절망이 아닌 감사와 찬양으로 기도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8장을 설교할 때마다, “우리가 허무함에 굴복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결국 구원과 회복을 이루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하나님이 도덕적 우주를 경영하신다고 믿는 기독교 신앙은, 역사의 미시적 국면에서 보이는 수많은 혼란과 모순을 단번에 해결해 주진 않더라도, 거시적 차원에서 반드시 정의와 선으로 귀결시키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고 말할 때, 그 구원은 이미 성도들 안에 시작되었고, 여전히 진행 중이며, 마침내 완성될 것이 확실한 구원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여전히 결핍과 실패를 체험하고, 자연도 때로는 우리에게 해가 되거나, 우리 죄의 결과로 인해 신음한다. 그러나 우리가 참음으로 기다리는 태도를 지키는 한, 궁극적으로 그날에 합당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의심치 않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현실에 접목시키는 기도가 바로 오늘날 교회가 힘써야 할 영역이라는 것이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다. 바울이 구원론의 정점을 우주적 비전과 성령의 기도 사역 안에서 찾아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탄식하는 피조물과 함께 영광의 날을 고대하되, 동시에 날마다 성령 안에서 간구하는 기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로마서 8장 18~27절은 서신서 전체, 더 나아가 성경 전체에서 매우 핵심적인 본문이다. 이는 단지 교리적 지식이나 신학적 이론에 머물지 않고, 삶의 고난 한가운데서 분투하는 성도들에게 ‘왜 인내해야 하고, 어디서 소망을 발견해야 하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강해하면서, “우리는 이미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결코 혼자가 아니며, 우리가 참아 낼 수 없는 부분까지도 성령의 탄식하심이 우리를 감싸 안으신다”는 사실을 여러 번 되풀이해 강조한다. 그리고 실제로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던 그 고백 뒤에는, ‘성령에 대한 전적인 의탁’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이 위대한 보증과 약속을 실제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하느냐이다. 장재형 목사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제안하곤 한다. 첫째, 고난을 마주할 때 그 고난을 단지 피하고 싶은 대상이 아닌, 장차 나타날 영광을 더 분명히 보게 하는 장치로 해석하라. 둘째,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음을 볼 때, 자연을 향해 자애로운 관리자 역할을 감당하라는 하나님 명령을 떠올리며, 생명과 환경을 돌보는 삶을 살라. 셋째, 우리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무엇보다 기도생활을 결코 포기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담대함 위에 ‘성령의 중보’를 신뢰하며 순종하는 태도를 갖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선언한 깊은 이유이며,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역설적 문장의 진정한 의미이다. 바울에게 이 소망은 공상이나 환상이 아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증명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위대한 소망으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며,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는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8장 강해에서, 바울이 자신의 서신 전반에 걸쳐 강조했던 십자가의 신학과 부활의 능력이, 결국 이 미래의 영광과 성령의 기도로 결론 지어짐을 지적하면서,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이 원리를 똑같이 적용해 살아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로마서 8장 18~27절은 온 우주적 구원과 동시에 개인적 구원의 성격을 모두 담고 있다. 피조물이 신음하며 탄식하는 것은, 곧 이 땅에서 계속되는 고통의 현실을 반영하고, 우리 또한 고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결국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주실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확신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쉬지 않는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현장에서 전했던 메시지를 종합해 보면, 이 본문이 주는 핵심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으로 견디며,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중보의 은혜를 놓치지 말라.”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당하는 어떤 고난도 의미 없는 아픔으로 끝나지 않고, 피조물의 신음도 결국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수렴될 것이며,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미래’를 향해 담대히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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