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3장에서 배우는 담대한 증인의 길: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십자가와 부활 신앙”

역사의 큰 방향 전환은 종종 한 사람의 양심에서 시작된다. 사도행전 22장 말미에 이르면 로마 제국의 질서와 유대 종교 권위가 한 인물, 사도 바울에게 수렴되고, 천부장은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그를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세운다. 그곳은 단순한 법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기억과 율법, 민족적 자긍심이 교차하는 심장부였고, 동시에 인간의 위선과 정치적 계산이 얽히는 권력의 무대이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셨고, 스데반이 피를 흘렸던 바로 그 자리에서 이제 바울이 선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교회가 세상의 권세와 마주 설 때 무엇으로 서야 하는지—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 진리를 따르는 정직한 양심—를 다시 묻는다.

바울은 공회를 똑바로 응시하며 첫마디를 꺼낸다.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그는 변명으로 시간을 벌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성령으로 새롭게 빚어진 양심이 자신의 삶 전체를 이끌어 왔음을, 간결하지만 결연한 신앙 고백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진리를 외면하는 권력은 흔히 폭력으로 답한다. 아나니아 대제사장이 바울의 입을 치라 명하자, 바울은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고 일갈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대목은 분노의 뿌리다. 바울의 격한 말은 혈기가 아니라 위선을 꿰뚫는 진리 사랑에서 나왔다. 동시에 그는 율법의 권위를 존중하며 자신을 낮춘다. “네 백성의 관원을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태도를 곧추세운다. 담대함과 경건함이 충돌하지 않고 한 인격 안에서 긴장 속 균형을 이루는 장면이다.

이어서 바울은 공회의 내부 구도를 정확히 읽는다. 부활을 믿는 바리새파와 부인하는 사두개파 사이의 갈등을 간파한 그는, 쟁점을 개인의 문제에서 이스라엘 신앙의 심장부로 되돌린다. “나는 바리새인이요,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나는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때문에 심문을 받는다.” 이 선언은 논리 싸움을 넘어 신앙의 핵심을 겨냥한다.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부활은 교리 목록 속 한 항목이 아니라 현재를 바꾸는 능력이며, 죽음의 질서에 굴복하지 않게 하는 삶의 동력이다. 부활신앙은 먼 내세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오늘 견뎌 내고 끝내 사랑을 선택하게 하는 실제적 힘이다. 바울의 말처럼 문제의 본질은 그의 경력이나 기질이 아니라 부활을 소망하는 그 믿음 자체였다.

바울의 선언은 공회에 격렬한 내분을 불러오고, 법정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다. 천부장이 다시 개입해 그를 구출하고, 밤이 되자 주께서 친히 바울을 찾아오신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사명에 대한 하늘의 보증으로 읽는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음모와 제도, 폭력을 넘어 사명을 끝까지 성취하게 하신다. 이 약속은 잠깐의 위로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튿날, 40여 명의 암살단이 단식 서약까지 하며 살벌한 계획을 꾸미는 현실 한복판에서, 그 약속은 실제의 보호와 인도하심으로 입증된다.

하나님은 내러티브의 변두리에 있던 바울의 조카를 통해 음모를 드러내신다. 이는 장재형목사가 자주 강조하는 섭리의 문법과 맞닿아 있다. 하나님은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는 작은 연결고리를 통해 거대한 일을 진행하신다. 소식은 로마의 천부장, 곧 클라우디우스 리시아스(한국어 자료에서 글라우디오 루시아로도 표기)에게 전해지고, 그는 전례 없는 호위를 편성한다. 보병 200, 기병 70, 창병 200, 도합 470명의 호위대가 한 죄수를 지킨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한 이들의 살의는 무산되고, 이방 제국의 군대가 하나님의 종을 보호하는 도구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주권의 역설”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입견으로 제외했던 통로를 사용하신다. 믿음은 그분의 주권이 엉켜 보이는 현실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그 현실을 꿰뚫어 일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용기다.

바울은 가이사랴로 이송되어 헤롯 궁, 곧 총독 관저에 머무르며 총독 벨릭스 앞 재판을 기다린다. 겉으로는 죄수의 행렬이지만,실상은 승전 행렬처럼 보인다. 제국의 병력이 복음의 증인을 둘러싸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3장은 이렇게 사도행전 전체의 선교적 궤도—“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행 1:8)—가 꺾이지 않고 계속될 것임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흐름을 오늘 교회의 방향으로 다시 제시한다. 복음의 행군은 늘 반대와 오해, 체제의 벽에 부딪히지만, 그 과정 자체가 복음의 진실을 드러낸다. 고난은 복음의 실패가 아니라 복음의 진실성을 비추는 배경막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세 증인의 맥박이 함께 뛴다. 베드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라며 구원의 유일한 이름을 선포했고, 스데반은 성전 중심주의에 갇힌 신앙을 깨뜨리며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증언하다 돌에 맞아 죽었다. 그 현장에서 증인들의 옷을 지키던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같은 공회 앞에 피고로 선다. 바울의 담대함은 베드로의 선포와 스데반의 피를 기억하는 데서 자란다. 장재형목사는 이 연속성을 “복음 증인의 계보”라고 부른다. 증인은 고립된 영웅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이어지는 교회의 역사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로 한 것은 “새로운 무언가” 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들—십자가와 부활, 말씀과 성령, 홀로 선 양심—을 다시 붙드는 일이다.

바울의 태도와 전략은 오늘의 교회에도 길을 제시한다. 그는 자기 변호에 매몰되지 않고, 쟁점을 본질로 돌려놓는다. 그 본질은 부활이다.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 교회에게 장재형목사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오해받고 심문받고 있는가. 교단의 체면과 문화적 호감도, 정치적 유불리 때문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부활을 믿는 소망 때문에 시험대에 오르고 있는가. 부활을 도덕적 우화로 축소하지 말라. 부활은 죄와 사망의 질서를 뒤집는, 우주의 통치가 새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현실이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손해를 감수하고도 진실을 말할 수 있으며, 관계의 단절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 그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결국 세상의 계산법을 닮아 간다.

주께서 밤에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믿음의 밤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같은 음성이 들린다. 담대함은 무모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행동의 결기다. 바울은 그 약속을 붙들고 제국의 도로를 타고 로마, 곧 당시 세계의 심장부를 향한다. 교회는 이 결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길은 종종 비바람과 소환장, 불친절과 오해로 가득하겠지만, 그 길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걸으신 길이고, 스데반이 피로 증언한 길이며, 바울이 쇠사슬에 매인 채로도 노래한 길이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의 낮아짐과 부활의 높아짐이 한 복음의 양면임을 설명한다. 우리는 낮아짐을 통해 높아짐에 참여하고, 높아짐의 소망으로 낮아짐을 견딘다. 이 역설을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은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니라 부활의 현실을 현재에 들여오는 영적 지성으로 드러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일상의 결 속에 새겨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은밀하게도, 때로는 로마 군대처럼 장엄하게도 역사한다. 바울의 조카 같은 작은 통로를 통해서도, 470명의 호위대 같은 큰 수단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을 끝내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두 방향으로 흐른다. 하나는 작은 길목에서 깨어 있는 민감함이고, 다른 하나는 큰 스케일의 간구를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함이다. 작은 것을 통해 큰 일을 행하시고, 큰 것을 통해 작은 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두 손길을 동시에 신뢰하는 것이 주권 신앙의 성숙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양심” 고백은 우리의 일터와 가정, 교회에서 구체적인 잣대가 된다. 양심은 감정의 떨림이 아니라 말씀으로 빚어진 내면의 법정이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가 부서질 때 양심이 정직해지고, 부활의 소망을 붙들 때 양심이 담대해진다고 말한다. 정직한 양심은 칭찬을 구걸하지 않고, 담대한 양심은 비난을 과도하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양심이 거짓을 미워할수록 우리는 타인을 향한 깊은 긍휼을 배운다. 십자가는 진리와 사랑이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진리 없는 사랑은 흐릿하고, 사랑 없는 진리는 잔인하다. 십자가와 부활에서 두 극은 화해한다.

사도행전 23장은 결말이 아니라 다음 장을 예비한다. 총독 벨릭스 앞의 공적 변론, 이어지는 베스도와 아그립바, 마침내 로마로 향하는 항해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장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한 확신을 얻는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방해와 오해를 뚫고 길을 찾아간다. 베드로의 선포, 스데반의 순교, 바울의 담대함은 교회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왜 오늘도 복음을 말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한다. “장재형목사”라는 핵심 키워드는 단지 한 설교자의 이름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신앙의 중심에 두고, 산헤드린과 같은 권력의 공회 앞에서도 양심으로 서며,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여 담대히 나아가는 신앙의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다. 우리 각자가 그 표지를 따라 주께서 주신 자리에서 복음을 증언할 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예상치 못한 길로 우리와 세상을 살리실 것이다. 담대하라. 예루살렘에서처럼, 로마에서도, 그리고 당신의 오늘에서도.

www.davidjang.org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