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빌라도의 인물됨과 예수님의 심문 과정
요한복음 19장 1절부터 16절에 나타난 빌라도와 예수님의 만남은 복음서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다. 이 장면은 표면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총독인 빌라도가 예수라는 한 유대인을 심문하는 과정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영원한 진리에 대한 대립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대립의 심장부에는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정당하고 조롱받는 예수님의 모습이 자리한다. 본문에서 빌라도와 유대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태도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면밀히 살피면,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언약,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시는 시련의 결정적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본문을 해석하며, 빌라도가 보인 갈등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흔들림 없는 순종의 길이 대조를 이룬다고 강조한다. 빌라도 안에도 일말의 자비와 예수님을 풀어주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끝내 그는 정치적 압박과 자기보존의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반면 예수님은‘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라’라고 선포하심으로써 자신의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드러내신다.
먼저,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확인하고도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채찍질한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한 이유는 당시 관례적으로 태형이라는 혹독한 벌을 통해 피고인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면, 그를 고소한 이들이 어느 정도 만족하여 처벌 강도를 낮추거나 해방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23장 16절과 22절에서 빌라도가 “때려서 놓으리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며 선언한 대목이 그것을 잘 보여 준다.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과 군중 앞에서 예수님을 실컷 채찍질한 뒤, 이렇게 처참하게 만들었으니 이제 이 사람을 풀어주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잔혹한 방식이긴 하지만, 당시 정치적 압력 속에서 빌라도가 최후로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 타협책이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때린 뒤 풀어주려 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본문의 초점이 빌라도의 관용이나 개인적 갈등이 아니라, 결국 “십자가에 넘겨지는 예수님”의 운명과 그 운명에 합세하는 각 집단의 악한 의도에 있다. 요한은 빌라도 안에 여전히 남아 있던 자비의 흔적—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때려서 놓겠다’는 말—을 생략함으로써, 결론적으로 빌라도 역시 예수님의 죽음에 결정적으로 가담한 자임을 부각한다. 그는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리(총독직)와 정치적 안전을 지키기 위해 무고한 자를 십자가 형에 내어주어 버린 책임을 지고 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본래부터 잔인하고 무자비했던 인물인가? 역사가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빌라도는 로마의 제5대 유대 총독으로 재임(서기 26–36년)하는 동안 여러 차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황제를 신격화하는 군기를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두는 등 종교적 모욕감을 준 일로 악명을 얻었다. 그는 유대 전통과 민족 감정을 무시했고, 그로 인해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인물이라 해도, 예수님을 대면하는 순간만큼은 예수님의 무죄함과 어떤 신비로움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여러 번 밝히고, 심문 중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난 뒤에는 더욱 두려워하게 된다(요 19:8).
이 지점에서 유대 지도자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듣고 더더욱 증오와 분노에 타오른다. 빌라도는 “혹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가 함부로 죽이는 것이 큰 죄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두려워했으나,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은 그 말 자체에 분노해버린다. 요한복음 19장 6절에 나타난 대제사장과 하속들의 외침—“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는 예수님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보고도 어떤 동정심도 가지지 못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 음모가 아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해석하며, 유대 지도자들의 극단적 분노와 증오는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임하던 그들 안에 숨겨진 영적 어두움과 무지가 얼마나 컸는지를 폭로한다고 한다. 빌라도 같은 이방 총독도 진실을 알 것 같아 두려워 떨었는데, 정작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오랫동안 메시야를 고대해 왔던 대제사장과 장로들, 서기관들은 오히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사실상 자신들의 신앙고백—“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 되신다”—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사무엘상과 열왕기, 그리고 선지서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라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그들은 빌라도에게 “이 사람을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라는 협박을 던진다(요19:12). 신성모독 혐의를 정치적 반역으로 둔갑시키며, 로마의 권력에 호소하는 모순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빌라도 역시 이 협박에 굴복한다.
결국 빌라도는 “보라 너희 왕이로다”(요 19:14)라고 선언하면서, 예수님을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반역자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역으로 조롱한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빌라도가 진실에 어느 정도는 접근해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진정 왕이심을 빌라도 스스로도 어렴풋이 느꼈을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하는 죄악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 극적인 순간에 요한복음 19장 16절은 빌라도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음을 선언한다.
이렇게 빌라도와 예수님의 심문 과정은, 결국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빌라도가 고백하듯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회의(懷疑)에 빠진 사람들도 있고, 제사장들이 보여주듯 아예 진리에 대한 경외심 자체를 잃어버린 자들도 있다. 요한복음 18장37절에서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라고 하셨는데, 유대 지도자들은 바로 그 소리를 거부한 것이다. 진리를 간절히 추구하고, 겸손히 받아들이기보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입장을 우선한 결과, 모든 참된 분별력을 잃었다. 이처럼 신앙이 깊어 보인다거나 열심이 가득해 보인다는 것이 곧바로 진리를 따른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본문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열정이 곧바로 진리 추구의 표지판이 될 수 없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처럼,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여기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죄악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어디로서냐?”라는 빌라도의 물음에 침묵하셨던 것, 그리고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라고 대답하셨던 장면도 중요하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권세나 유대인들의 압박에 의해 죽음을 맞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순종하여 자신을 내어주심을 강조하신다. 이것이 십자가로 가는 길이긴 하지만, 그 길은 결코 패배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를 이루는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으셔야 했으나, 그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자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는 결정적 사건이다. 사람의 눈에는 패배처럼 보이지만, 장재형목사는 “십자가는 가장 큰 승리의 현장”임을 여러 강론에서 누차 밝힌다. 빌라도조차 두려워 떨었던 그 참혹한 죽음은, 하나님의 자녀를 살리는 생명의 길, 죽음을 멸하는 승리의 길이었다.
그러므로 빌라도와의 심문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영적 드라마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빌라도처럼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예수를 죽음으로 넘겨준 자들도 있고, 유대 지도자들처럼 “가이사 외에 왕이 없다”라며 하나님을 버린 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예수님은 흔들림 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다. 이는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자’가 얼마나 견고하게 진리에 서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 장면이다. 진리에 대해 회의하는 빌라도, 아예 분노로 진리를 거부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보며,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혹시 우리의 종교적 열심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꼴이 되지는 않는지, 혹은 세상 권세와 타협하여 진리를 희석시키지 않는지 말이다.
한편, 빌라도가 예수님께 “어디로서냐?”라고 물을 때, 우리는 요한복음 전체가 제시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떠올려야 한다. “위에서 난 자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요,”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이”라는 것이 요한이 지속적으로 그리는 예수님의 초월적 정체성이다. 이 장엄한 진리를 명확히 깨닫지 못하는 한, 빌라도의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으며, 유대인들의 증오는 해소되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믿음 안에 서 있을 때, 진리가 무엇이며 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야 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의 길을 열어 준다.
빌라도가 “너에게는 내가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다”라고 장담했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그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셨다. 세상 권세는 빌라도나 유대 지도자들처럼 흔들리고 타협하기 쉬우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권세는 오히려 침묵과 순종, 그리고 자기 비움으로 완성된다. 이것은 세상의 통념으로 보면 패배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안목으로 볼 때 하나님 나라의 결정적 승리이자, 죄와 사망을 깨뜨리는 절대적 능력이다. 이렇게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주권을 신뢰하게 만든다.
요한복음 19장 1절부터 16절까지는 결국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주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로마 제국의 법정에서, 그 법을 가장 잘 알면서도 진리를 두려워한 빌라도가 정치적 압박에 굴복해 무죄한 예수님을 사형에 넘겼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처형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선민이자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 지도자들이었다. 이 모순된 역사는,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죄와 자기보존의 본능 앞에 타협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예수님은 어떠한 폭력이나 미움에도 휘둘리지 않고, “위에서 주신 권세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수모와 고통을 받아들이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곧 진정한 믿음의 표상이라고 설파한다. 즉, 세상 권세와 압력,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에 의탁하며, 흔들림 없이 순종하는 모습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제자도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빌라도와 예수님,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의 대립은 단순히 과거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직접적인 도전을 준다.
2. 십자가의 길과 진정한 왕이신 그리스도의 의미
앞서 살펴본 빌라도와 예수님의 심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음모나 사법적 오류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했던 사건임을 발견한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선택할 수 있었던 여러 종류의 죽음 중 최악의 죽음이었다. 돌에 맞아 죽는 형태도 가능했고, 공권력의 오판으로 감옥에서 처형당하는 경우도 상상해 볼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가장 극심한 고통과 가장 큰 수치심을 동반하는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지셨다. 이는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인자가 들려야(높여져야) 하는 구원의 상징이 바로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십자가 형벌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흉악한 범죄자에게 적용하던 처형 방식으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저주’의 의미가 강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라”는 말씀이 있기에, 유대인들은 십자가 처형을 신성모독과 동일시하고 경악하며 혐오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저주받은 자의 위치로 직접 내려가심으로써, 오히려 모든 인류가 겪어야 할 저주를 자신의 어깨에 지신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왜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는가’(빌 2:7)에 대한 근본적인 답변이 담겨 있다. 이처럼 자기를 비워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행보가 곧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세상 나라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또 수용하기 어려운 방식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섬김, 자기희생, 순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작동하는 원리, 즉 사랑과 희생, 그리고 순종의 심장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왕이라면 권좌에서 다스리고 명령하는 존재여야 하는데, 예수님의 왕 되심은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으로 완전해진다. 이는 정반합의 역설이 아니라, 애초부터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자기를 낮추는’ 데 있다는 것을 예표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마 20:26-27).
그렇다면 빌라도가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외쳤을 때, 예수님께서 피로 얼룩진 채 초라한 모습으로 서 계셨지만, 실은 그 자리가 영적 의미에서 진정한 왕좌와 같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곧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 말을 조롱으로 듣고, 빌라도는 비꼬는 의도로 사용했을지 모르지만, 복음서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진실임을 선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그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달렸다(요 19:19). 이는 로마법상 범죄 사실을 적어넣는 명패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실제 신분을 선포하는 타이틀이 되었다.
이 ‘왕’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따를 것인가? 십자가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주님을 오해할 수 있다. 단순히 ‘능력의 왕, 기적의 왕’으로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내 삶에 유익을 주는 도구나 신적 존재로만 예수님을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실제로 보여주신 왕권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을 살리는 희생의 길이었다. 그래서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련해 보이고 찬란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고전 1:18).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이중 고통—채찍질과 십자가—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믿음의 여정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라는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채찍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맞으셨고, 가시관으로 머리가 찔려 피를 흘리셨으며, 결국에 십자가로 못 박히셨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처형 방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길은 오히려 생명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의 신앙 여정에 때로는 큰 시련이나 핍박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적 열매를 맺고자 하시는 과정이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주님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이를 잘 요약한다.
이처럼 십자가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를 묵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제자도의 길’을 떠올리게 된다. 주님의 삶이 곧 우리의 본이 되며, 주님의 죽음이 곧 우리의 표상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는 말씀은, 예수님이 밟으신 그 길을 우리도 함께 걸어가야 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실제로 빌라도와 대제사장, 군중들의 모습은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우리 인간의 본성과 상충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 체면, 권력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십자가를 외면하거나 혹은 더 큰 폭력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제거하려 한다.
결국 십자가는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광대하며, 동시에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명확히 알려준다. ‘나도 주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우리의 신앙을 깊은 고민으로 인도한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영성을 단순한 감상이나 눈물의 호소가 아닌, 삶의 실제적 적용으로 끌어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교회 안에서 십자가를 말로만 외치고, 상징적으로만 붙들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 삶의 여러 상황 속에서 자기 부인과 순종, 그리고 희생의 자세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십자가가 불러오는 ‘죽음’이라는 단어에 본능적 두려움을 갖는다. 빌라도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두려워했듯이, 우리 역시 진리 앞에 선 내 모습을 직면하면 두려워질 때가 많다.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서 있는가? 혹시 저 유대인 지도자들처럼, 혹은 빌라도처럼 죄 없으신 주님을 밀어내고 세상의 권세에 타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각이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넘어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해방과 자유다. 죄책감에 묶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안에서 ‘나는 이미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길이 열린다.
십자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첫째로, 빌라도처럼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정치적 계산이나 현실의 유불리를 앞세우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빌라도는 본심으로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지만, 민중의 소리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라는 협박에 굴복했다. 그 결과, 그는 영원히 예수님을 사형에 내어준 책임자로 역사에 기록되고 말았다. 우리도 사회와의 부딪힘, 혹은 개인적 손해를 두려워하여 때론 복음을 타협하거나 진리를 왜곡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무죄한 예수님을 넘겨준 빌라도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둘째로, 유대 지도자들처럼 종교적 열심이 하나님 뜻을 가장 크게 대적할 수 있음을 각성해야 한다. 그들은 본인들이 정통성을 지녔고,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했으며, 메시아를 진심으로 기다린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실제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오시자, 오히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에게 넘기는 일에 앞장섰다. 그토록 기다렸던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신앙의 열심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늘 말씀과 성령 안에서 바른 분별력을 구해야 한다. 자칫하면 맹목적 열정이 이단적이고 편협한 길로 빠질 수 있다.
셋째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단지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우리 삶의 실체적 힘이 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죽음의 잔을 스스로 거부하지 않고 마시겠다고 결단하신 것은, 사랑의 아버지와 하나된 아들의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가장 끔찍한 처형방식인 십자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부활과 생명의 관문이기도 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진심으로 따르고,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순종하려면,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이 신뢰가 없으면,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은 단지‘자기고행’이나 ‘성취 불가능한 이상’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넷째로, 예수님의 죽음이 ‘가장 비참한 모습’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라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 십자가는 모든 영적 세계가 뒤집히는 패러다임 전환의 자리다. 사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자신이 이기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모든 사람의 죄값이 치러졌으며, 오히려 사단이 붙들고 있던 ‘사망의 권세’가 파괴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로 인해 가능했으며,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렸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왕은, 인간의 왕좌에서 호화롭게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든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다.
다섯째로, 십자가는 개인적 구원을 넘어 공동체적 차원의 변화를 일으킨다. 초대교회가 예수님 부활 이후, 로마 제국의 폭압과 유대 지도자들의 탄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체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이 이미 가장 처절한 길을 기쁨으로 가셨고, 마침내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어떤 환난과 박해에도 낙심하지 않는다”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이 교회를 하나로 묶었고,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성장할 수 있게 했다.
마지막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메시지가 주어진다. 현대사회는 예수님의 때와는 다른 문화와 기술, 제도를 갖추었지만, 인간 내면의 죄성과 세상의 가치관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우리는 빌라도처럼 정치적 이득과 진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유대 지도자들처럼 종교적 열심으로 그리스도의 본질을 훼손하기도 하며, 군중처럼 단순히 여론에 휩쓸려 죄 없는 자를 정죄하기도 한다. 이런 혼돈과 갈등 속에서 십자가는 여전히 우리에게 길을 보여준다. 그것은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순종과 희생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신학을 통해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려면, 먼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칫 교회가 세속 권세나 사회 문화와 야합하여 빌라도나 유대 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을 방치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십자가 정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교회가 참다운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며, 둘째로 세상 권세에 대한 두려움보다 ‘하늘 권세’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늘 말씀과 기도로 진리를 분별하며,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안에서 십자가 영성을 실천해야 한다.
결국, 요한복음 19장 1절부터 16절에 나타난 빌라도의 심문 장면은 십자가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질문—“나는 과연 누구를 왕으로 모시는가?”—를 던진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왕이라 부를지 모르나, 실제로는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며 예수님을 밀어냈다. 빌라도는 표면적으로는 로마 황제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상은 자기 생존과 안위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다. 이들은 모두 자칭 ‘왕’이신 예수님을 부정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진정한 왕이심을, 곧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자이심을 드러내셨다.
십자가는 완전한 사랑, 완전한 희생, 그리고 완전한 순종의 집약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십자가의 도를 인정하고 삶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열심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그것이 십자가의 정신과 어긋난다면, 결국 대제사장들이 보여주었던 왜곡된 종교적 증오를 재현할 뿐이다. 반대로, 세상 권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십자가가 보여준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경험한다면, 우리는 빌라도처럼 흔들리지 않고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다.
따라서 빌라도의 심문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행보는, 우리에게 믿음과 순종, 그리고 희생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졌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치르신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통해 가능해졌다. 우리는 이 진리를 깊이 묵상하면서, 신앙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이 없도록 자기를 살펴야 한다.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시대를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날에도 기독교 신앙이 조롱받고, 일부 지역에서는 심한 박해가 지속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치적으로 왜곡하여 반대 세력으로 몰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서로를 공격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우리가 다시금 붙들어야 할 중심은 “십자가의 예수님”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모욕과 고통을 온몸으로 받으시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셨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영광이며, 진정한 왕으로서의 능력이 드러난 순간이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가 믿고 따를 때, 우리 안에 ‘부활의 소망’이 살아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이기셨기에, 십자가는 패배가 아닌 승리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거듭해서 강조하며, “죽음에 맞선 부활의 생명력이 없으면, 십자가는 그저 가혹한 처벌 이야기로만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 부활은 십자가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아니라, 십자가가 지닌 사랑과 희생의 의미가 진짜라는 것을 증거하는 완성이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통해 ‘왕’의 정의를 새롭게 배운다. 세상은 힘과 통제, 무력을 통해 군림하는 왕을 원했으나, 예수님은 사랑과 섬김, 자기희생으로 왕 되심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빌라도의 심문과 대제사장의 배반, 군중의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삶이 세상 권세자나 종교 지도자들처럼, 자기 욕심과 자존심, 정치적 안위, 종교적 독선에 묶여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십자가의 길이 어렵고 좁아 보여도, 그 길이 참 생명의 길임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섬기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그 길에 두려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이미 걸어가셨고, 부활로 완성하신 길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용기와 확신을 준다.
요한복음 19장 1절부터 16절에 나타난 이 심문 사건은, 겉으로 보면 유대 종교 지도자와 로마 권력자 사이의 단순한 정치적 협잡과 사법적 불의의 상징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대속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는 장면이다. 죄악과 불의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그 와중에, 예수님은 스스로를 끝까지 내어주어 “죽기까지 순종”하셨고(빌 2:8), 우리는 그 순종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 이것이 복음이요, 우리가 소망을 두는 메시지다.
결론적으로, 빌라도와 유대 지도자들의 악한 모습,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을 대조해서 볼 때,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 진리를 알아야 한다. 진리를 모르면 종교적 열심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어느 것에도 희망이 없고, 결국 죄 없는 이에게 가장 극심한 폭력을 가하게 될 위험이 있다. 둘째,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가 고난과 희생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길이야말로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단지 교리로만 외우지 말고,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체화해야 한다. 예수님이 ‘왕’이심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모든 결정과 말, 행동이 그 왕의 통치에 합당하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진리를 붙들고 십자가를 따르는 이들만이 참된 교회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교회가 세상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구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랑은 자기중심적 종교나 세속적 권력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교회는 항상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이 부활하심으로써 선포하신 새 생명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이며,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다.
이렇게 요한복음 19장 1절부터 16절까지 이어지는 빌라도의 심문 장면과,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선고받는 과정을 깊이 묵상하면, 우리는 한편으로 우리 안에 있는 빌라도적 요소, 대제사장적 요소, 군중적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죄인들을 향해 돌아가시면서까지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순종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빌라도가 말했을 때 보여준 예수님의 모습은, 피로 범벅이 된 처절한 인간의 몰골이었으나, 사실 그 분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진정한 왕이셨다. 이 역설적 이미지가 바로 복음의 정수(精髓)다.
결국, 예수님은 세상의 거부와 악의적 모략에도 굴복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진리를 증거하신다. 그 진리는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은 이처럼 자기 모든 것을 희생할 만큼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 안에 들어온 자마다 이제 더 이상 사망의 종이 아니라, 의와 생명의 종이 된다. 우리가 이 복된 소식을 전하며 살아갈 때, 세상은 여전히 반발하고 조롱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지닌 능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설교에서 반복해온 것처럼, “우리가 진리를 붙들 때,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우리를 하나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종교 지도자들이 거짓 증언을 퍼뜨리고, 군중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어도, 결국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그 승리는 세상의 방식과 달랐지만, 사망권세를 이긴 참된 승리였다. 그리고 그 승리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한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겸손히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은혜와 능력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또한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새롭게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빌라도의 심문 과정(요 19:1-16)은 한 인간의 갈등과 정치적 타협 속에 드러난 불의, 종교적 열심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치명적 악을 동시에 비춰주는 동시에, 예수님이 죄인의 구원을 위해 영광의 왕좌가 아니라 치욕의 십자가를 택하신 장엄한 선택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십자가가 단순한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예정된 대속의 사건임을 깨닫는다. 또한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십자가의 길’을 각자에게 주어진 형태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을 구해야 함을 배운다.
이렇게 나누어 살펴본 요한복음 19장 1-16절은, 장재형목사가 말하듯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즉, 우리는 십자가의 정신을 통해 교만과 폭력, 거짓과 위선을 버리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야 한다. 빌라도처럼 진리를 붙들 힘이 없어서 세상의 목소리에 굴복하거나, 대제사장들처럼 종교적 자부심이 오히려 참된 진리를 거부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날마다 자기를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로 대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내 삶의 축으로 삼아, 오늘도 거룩한 순종과 뜨거운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는 빌라도의 조롱 섞인 말이, 사실은 신앙고백의 표제처럼 들리는 아이러니. 그 아이러니를 통해 우리는‘가장 약한 모습을 한 하나님의 아들’이 실은 ‘가장 강한 구원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패배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과 영광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성경의 많은 증언이 이를 뒷받침하고, 교회 역사 속에 믿음의 선진들이 목숨 걸고 고백해온 바 역시 이것이다. 우리가 그 길을 기쁨으로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과 공동체를 통해 당신의 나라와 의를 확장하실 것이다.
바라기는, 요한복음 19장 1-16절의 말씀을 대하면서, 빌라도와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에 자신을 비추어 회개할 부분을 찾고, 또한 예수님이 끝까지 지키신 십자가 순종을 본받아, 우리의 신앙고백이 말뿐 아니라 삶으로 증명되는 성숙에 이르기를 소망한다. 장재형목사가 가르치듯이, 참된 복음이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이끌어 자기 부인의 길을 걷게 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반드시 부활의 소망과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빌라도의 법정에서부터 시작된 십자가 사건이 주는 영원한 울림이자, 교회 공동체가 세상 가운데 증언해야 할 핵심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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